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문단 편집) == 비판 == * '''비평의 '진정한' 성실성 : 남이 틀렸다고 말할 용기 vs. 내가 틀렸다고 말할 용기''' 사실, 본서가 갖는 가장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한계의 지점은 바로 본서의 서문에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저자는 '비평의 성실성' 이라는 표현을 만들면서, 우리에게는 상대방이 틀렸다고 말할 용기가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그러한가? 사실 우리는 그런 용기를 갖는 것보다는, 타인의 비판에 직면했을 때 내가 틀렸다고 고백할 용기를 갖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남이 틀렸다며 펜을 칼 삼아서 매섭게 비판하는 것은, 사실 어지간한 범인(凡人)들이나 소인배들도 할 수 있는 범속한 활동이다. 당장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사이다(유행어)|사이다]]라며 인기를 끌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진정 어떤 경지에 오른 [[군자]], [[신사]], 교양 있는 [[시민]], 사회의 어른, 오피니언 리더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단 1%라도 전제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공적 논쟁에 임할 때 "당신이 틀렸다" 면서 용기 있게(?) 도전하던 바로 그 태도부터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용기야말로 진정으로 사람들의 지지와 신뢰와 응원을 받는다. * '''"[[포기하면 편해|이성적인 대화 따위 해 봤자 안 돼]]"? : 진보 진영을 향한 저자의 위험한 유혹''' > "이제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그걸 기어코 함께 가지 않겠다고 버팅기는 이들에게 '너의 이유는 뭐니' 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우선은 앞으로 밀든 아예 뒤로 자빠뜨려 버리든, 네가 징징대도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는 걸 '이해시키는 것' 이 우선이지 않을까." > ----- > - p.104 일반적으로 진보진영은 [[계몽주의]]를 지지하며, 보수주의 자를 [[계몽]]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논어]]에서 말하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저자는 일종의 비관론적 계몽주의, 즉 [[선민사상|자기 편을 계몽된 존재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대편을 계몽이 불가능/불필요하다고 비관]]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본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며, 공적 토론에 임하는 사람의 글로서나, [[진보]] 인사가 자신의 사상을 펼치는 글로서나 다분히 문제적인 영향력을 초래한다.[* 한 예로 저자는 본서에서 '여성에게는 남성을 계몽시킬 의무가 없으며, [[무지]]에 대한 책임은 무지한 자가 지게 될 뿐' 이라고 말하지만, 비록 여성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을지 몰라도 진보 진영에게는 그것이 최소한 도덕적 당위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저자는 63페이지에서 남성들을 비합리주의자로 섣불리 전제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하고,[* "질문하고 증명(혹은 반증)해야 할 건, 과연... ''(중략)'' ...한국 남성 부족을 현대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시민사회의 전제가 될 규범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놀람과 증오의 시선으로 다룬다 해도 그들을 쉽게 비합리주의자로 전제하는 것은 위험하다."(p.63)] 134페이지에서는 인간이란 반성하고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불행히도 이는 도덕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저자는 언제 그런 소리를 했냐는 듯이 본서 전체에서 '[[미개]]한 남성 부족사회' 이미지를 너무나 손쉽고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최태섭]]과도 유사하게, 저자가 상상하는 남성들은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 와 같은, 이성적인 설득이 안 통하고 마냥 귀 막고 눈 가리고 빽빽거리는, 본서의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을 빌리자면 "[[징징]]대고 있는"(p.104)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국내 페미니즘 도서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일그러진 남성관이다. 현실의 '놀라게 하면 안 된다던' 저 와오라니 부족조차도 자기네 관광 웹 페이지를 운영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전향적으로 계몽되고 빠르게 개화되는지에 대해 놀랄 만큼 낙관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히려 저자야말로 인류학적 부족사회에 대해 다분히 [[고정관념]]적이고 (근대 [[제국주의]]적 수준의) 언PC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저자는 이미 54페이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저자에 따르면, "흔히 남성의 무지는 권력에서 온다고 한다. 맞다. 하지만 무지를 벗어난 남성의 지성과 윤리도 사실 권력에서 온다. 그걸 잊어선 안 된다."(p.54) 하지만 저자는 그걸 잊었다. 저자는 자신이 54페이지에서 우연히 열어 보였던 가능성이 무엇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들은 그 권력을 통해 무지로 일관하며 살 수도 있지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권력을 선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남성들에게 설득은 불필요한가?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남성들은 "그래 잘해 봐라, 너만 손해지" 라는 대답 이상으로 거창한 대답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가? 만일, 조금씩이나마 남성들이 열정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페미니즘을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설득이 필요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런 지적 호기심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거슬린다면, 이는 그것이 남성들에게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있음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인가?) 사실 저자와 같은 설득의 전략은 드문 것이 아니다. 대중 강연 등을 뛰는 일부 [[남성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남성들을 구구절절 설득하기보다는, 단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너희가 적응해야 한다' 고 알려주는 게 최선" 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임금격차|남녀 간 소득격차]]에 관련된 유명한 [[논문]]을 쓴 어떤 연구자도 자신의 블로그에서 [[https://sovidence.tistory.com/m/1001|"역사적 수레바퀴에 깔려죽은 사마귀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 이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가 (비록 [[의도는 좋았다]] 할지라도) 과연 진정한 진보의 메시지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아니, 진보이기 이전에 이미, 이것이 정말 바람직한 설득의 전략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정말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인가? 자칫 인간 교화에 대한 불구적인 포기선언이 되는 건 아닌가? 진보진영은 이런 [[패배주의]]적 시민성 담론이 소통되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가? 설득이 아예 불가능한 게 아니라, 단순히 기존의 설득 전략이 효과적이지 못해서인 건 아닌가? 경우에 따라,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단순히 설득할 의욕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는, 만에 하나, 반동세력이 그저 설득되지 않은 채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만 도태되어 주었으면' 하는 존재여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본서의 한 구절에서 저자가 '정 알아듣지 못하면 [[펜스 룰]]도 나쁘지 않겠다' 고 말한 것은 도대체 어떤 의도인가? * '''[[진영논리|메갈리아의 악행은 사회의 책임, 그러나 일베의 악행은 개인의 책임?]]''' 본 문서 상단에서 언급했던 저자의 '사회적 우쭈쭈쭈' 발언을 다시 떠올려 보자. 전통적으로 [[진보]] 진영에서는 사회문제를 구조가 아닌 개인으로 환원하는 미시적 분석에 더욱 부정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사회적 우쭈쭈쭈' 라는 말은 상당히 가혹한 비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페미니즘 비평에서 어떤 [[묻지마 범죄]]를 그 범죄자 개인의 도덕적 일탈의 문제로 설명하려는 것은 "그 범죄자를 낳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이고 구조적인 병폐를 간과하고 있다" 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장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을 [[조현병]]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뭐라고 항의했는지 상기해 보자. 그런데 본서는 바로 그런 항의를 '사회적 우쭈쭈쭈' 라고 치부하고 있다. 정말로, 《[[시사IN]]》 등을 비롯한 그 분석가들은 [[언론플레이|일베 이용자 개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하기 위한 고단수의 동정론을 펼쳤던 것인가?]]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저 "사회와 괴리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는 [[사회과학]] 모든 분야들이 공유하는 학문적 대전제에 입각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전제 자체가 개인의 행동에 대한 개인의 책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드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가해자를 은근슬쩍 감싸기 위해서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라고 [[실드]]를 치려 했다는 생각은 너무 나간 해석이다. 메갈이든 일베든, [[악행]]이 있었다면 개인은 우선 마땅히 그 죗값을 치르되, 우리 사회 전체도 반성해야 할 부분은 반성하자는 게 가장 균형 잡힌 결론이다. 그러나 [[진영논리]]에 빠질 경우, 모든 사람들은 우리 편의 잘못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었던 사회적 환경의 문제' 로 해명하고, 상대편의 잘못은 '개인의 의도성 다분한 악행' 으로 자연스럽게 몰아간다. 물론 저자가 [[메갈리아]]의 악행에 대해 본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페미니즘|저자의 전반적인 관점을 고려할 때]] 메갈-워마드 계통의 반사회적 악행에 대해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맥락]]을 보아야 한다' 는 [[윤김지영]] 류의 해명에 대해 반대할 가능성보다는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의문은, '일베에 대해서도 동일한 분석 수준(level of analysis)을 적용하겠다는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평가 절하하는가?' 인 것이다. 아마도 [[사회심리학]]자들은 대번에 궁극적 귀인 오류(ultimate attribution error)라는 개념을 대답 대신 제시할 것이다. *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라는 말에 대해" 라는 말에 대해''' 저자는 본서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질문하는 남성들의 본심이 정중함보다는 무례함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질문을 빙자하여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이외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질문자에게는 최선을 다해 질문에 답하던 페미니스트 여성일지라도, 또 다른 질문자에게는 "내가 어떻게 그런 개념이나 논란까지 하나하나 다 알겠냐, 가서 알아서 찾아봐라" 며 화를 낼 수도 있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지식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차원이므로,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 경우,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 라는 저자의 말은 후자의 질문자에게는 적절하지만 전자의 질문자에게는 심히 무례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질문이 갖는 맥락적인 미묘함으로 인해서 나타난다. "알아서 공부하세요" 의 반응은, 질문을 빙자하여 은근슬쩍 무례하게 비웃는 맥락에서는 꽤나 유효한 '한 방' 이 되겠지만, 정말로 정중하게 질문하는 맥락에서는 철저히 무가치한 답변이 된다. 사실, 모든 질문자들을 퉁쳐서 무례하다고 비판하는 저자도 문제지만, 이 점에서는 일부 답변자들을 일반화해서 [[사이비 종교]]의 포교법이라며 비판하는 [[박가분(평론가)|박가분]]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양쪽 모두 [[케이스 바이 케이스|각각의 질문들이 갖는 미묘한 느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주제를 바꾸어 보자. 예컨대, "[[진화론]]이 정말로 충분한 근거가 있나요?", "[[예방접종|예방주사]]는 부작용이 심하다던데 사실인가요?" 라는 질문이 갖는 미묘함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이성과 합리의 입장에 서 있다면,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우리는 대부분의 맥락에는 일단 [[자연선택]]이나 [[집단 면역]] 이야기를 간단하게라도 꺼내보는 게 일반적이며, [[창조설]]이나 [[백신 음모론]]처럼 상대방이 들을 의사가 없다는 게 '확실히 보이는' 맥락의 경우에만 처음부터 냉담하게 받아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는, 모든 맥락의 질문자를 다짜고짜 창조설자 내지 백신 음모론자로 싸잡으려 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저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조차 비판하는 행태다. 그보다도, "알아서 공부하세요" 가 갖는 진짜 문제점은 실상 다른 곳에 있다. 이런 발화는 '''그 화자 본인의 지식적인 우위나 의사소통의 역량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선빵|상대방에게 먼저 날렸다고 해서]], 그 사람이 페미니즘에 대해 상대방보다 항상 지식적 우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이효민(2019)은[* 이효민 (2019). 페미니즘 정치학의 급진적 재구성: 한국 'TERF'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34(3), 159-223.] 국내 [[TERF]] 진영이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제도권 여성학계의 기존의 지적 공헌]]을 전면 거부하고 젠더에 대한 [[독자연구]]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남들에게는 공부하라고 다그치지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정작 본인들도 딱히 공부를 하는 건 아니며]], 그나마 쉴라 제프리스(S.Jeffreys) 같은 (페미니즘이라 불러 주기도 어려운) 논란 많지만 자기네 입맛에 맞는 저술가만을 선호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무지가 권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알아서 공부하세요" 라고 말하는 여성들 본인들조차 무지 상태에 빠져 있을 가능성은 본서에서 은폐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말한 바 남성들의 '몰라도 되는 힘' 은, 남녀 모두의 '자기 알고 싶은 것만 알고자 하는 경향' 앞에서 그 정치적 분석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물론 적잖은 경우 강자의 무지와 약자의 계몽이 대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자의 무지에 대항하기 위해 약자들이 [[독자연구]]에 골몰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본서에서 관련 언급은 없으나, 당장 [[미러링(신조어)|미러링]]이라는 단어 자체가 [[메갈리아]] 홍보용 페이스북 계정에서 자기들끼리 만들어 낸 표현이기도 하다. 그 개념이 [[패러디]](parody)라는 개념과 상통함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홍보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